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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Listen'에 해당하는 글(19)
2008/01/10   구스타프 말러
2007/11/20   Claudio Abbado (1)
2007/10/18   Karl Bohm (1)
2007/10/17   환희와 절망사이 (2)
2007/10/06   브람스 교향곡 제4번 (8)
2007/10/06   야사 하이페츠 (2)
2007/09/29   말러 교향곡 5번 (2)
2007/09/06   Luciano Pavarotti (7)
2007/07/23   카라얀과 비행기 (1)
2007/07/17   사이먼 래틀 (2)


구스타프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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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Mahler(1960~1911)

왜 구스타프 말러인가?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콘서트홀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말러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 처럼 지휘자들이 꼭 한번쯤은 거쳐 가야 할 작곡가가 되었고 많은 지휘자들이 말러의 작품을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 있다. 하지만 클래식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말러의 음악은 매우 길며 난해하고 대편성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쉽게 친해질 수 없는 작품이기에 절대 대중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말러의 음악을 즐기는 말러리안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말러의 작품은 생전에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복잡하다는 악평을 받으며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초연들은 대부분이 실패로 끝났고 작곡가 자신도 실연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작품도 다수 존재한다. 말러의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지휘자 브루노 발터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연주되기도 했으나, 말러의 작품을 반세기 가까운 잠에서 일어나게 한 지휘자는 바로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번스타인은 매우 난해하고 대편성인 말러의 작품을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고 뛰어난 해석으로 말러의 작품을 부활시켰다. 번스타인이 말러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이유는 번스타인 그 역시 뛰어난 작곡가였기 때문에 작곡가의 눈으로서 곡을 꿰뚫어보고 해석하였다는 측면도 강하지만, 번스타인 역시 말러와 동일하게 유태인이었으며 말러와 비슷한 심리를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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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태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 -구스타프 말러


말러는 평생을 이방인이라는 시선으로 살아왔고 이러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빈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라는 성공을 이루었으나, 진보적이고 난해한 작품세계로 하여금 수많은 반대세력과 싸워왔다. 번스타인 역시 유럽에서는 미국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편견어린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리고 그의 해석이 지나치게 현대적이기도 하고 파격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반대세력을 몰고 다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말러에게 번스타인은 동질감을 느꼈고 말러의 작품세계에 강한 애착을 가져 뛰어난 해석을 할 수 있었으며 많은 말러리안들에게 번스타인의 말러는 번스타인의 말러가 아닌 말러의 말러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번스타인의 노력으로 말러가 부활한 것이며, 번스타인의 말러를 들으면 어려운 말러가 쉬워지느냐? 결코 아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말러를 들여다보려면 번스타인처럼 말러의 일생과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교향곡은 내 삶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나의 교향곡에는 나의 경험, 나이 고통, 나이 존재 나의 모든 인생관이 들어있다 나의 불안, 나의 공포…" - 구스타프 말러


말러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인생이 아니었으며 말러의 이러한 심리는 그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나타난다. 말러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학대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학대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한결같이 사랑했으며 집안을 유지하는 기둥이었으며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순교자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었고 말러의 정신세계에 크게 자리잡았다. 또한 어린 시절 많은 동생들을 잃은 경험은 말러로 하여금 어린 나이부터 죽음의 공포에 대하여 고민하게 하였다.


말러는 이방인이라는 편견과 냉대 속에서 얻은 빈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라는 절대 권력을 반대파의 음모로 잃게 되고, 심장병을 앓았으며 어린 딸을 병으로 잃었다. 힘들게 결혼에 성공한 아내 알마 말러와의 결혼생활은(알마 말러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애인이었으며 19살 연하였고 음악적으로 뛰어났으며, 말러의 뮤즈였다)말러의 출신 때문에 편견 속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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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간추려 본 말러의 인생에서도 나타나듯이 말러의 인생은 매우 굴곡이 심했으며 비극적이었다. 하지만 단순이 인생이 비극적이었다고 해서 이러한 인생의 굴곡과 고뇌가 작품에서 나타난다고 해서 말러에 대하여 진정으로 공감하고 말러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왔으며 말러보다도 더욱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온 예술가들 역시 매우 많기 때문이다. 말러의 작품세계를 진정으로 공감하려면 그의 내면의 심리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말러의 작품은 ‘우리’가 아닌 ‘나’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인류가 고난을 극복해서 빛으로, 평화로 나아가는 것을 표현했다면 말러는 지극히 내면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말러는 세기말에 살아왔으며 말러가 살던 시대는 급격한 변화와 동양문명 등 새로운 문명의 유입 그리고 기술의 발달로 극심한 변화를 겪던 시대였다. 농경중심의 공동체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개인주의와 허무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말러는 심한 고독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고뇌와 함께 그의 비극적인 삶을 작품에 투영했다. 말러는 끊임없이 신의 존재를 찾았으며 자신을 이러한 고통과 불안 속에서 구원해줄 존재를 계속해서 찾았고 어둠속에서 빛을 갈망했다.


개인의 고독과 불안함 그리고 우울함, 그 속에서도 행복을 찾으려 하고 빛과 어둠이 쉴 새 없이 교차하는 심리. 지금은 어둠에 머물러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끌어올려 줄 수 있는 빛의 세계를 찾으며 자기 자신의 구원을 갈망하는 말러의 작품세계는 파편처럼 흩어져 점차 ‘우리’보다 ‘나’가 앞서며 지독한 개인과 개인의 경쟁을 유도하는 현대에서, 기술은 고도로 문명화 되었지만, 정서는 기댈 곳 없이 끊임없이 방랑하는 정서적 유목민의 모습이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었다. 언제나 고민하고 갈등하지만 빛을 동경하며 행복과 어둠을 번갈아가는 말러의 모습은 이제 서야 사람들과 진정으로 호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러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왔다고 하였다. 말러는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시대가 도래 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홀로 남았다는 기분을 느끼며 내면적인 고통과 불안 그리고 한없는 고독감을 느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여 자신의 작품이 미래의 사람들과 더욱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Mahler Symphony No.6 A minor 'Tragic'


비극적이라는 제목은 말러 자신이 직접 붙인 것이고, 이 곡은 말러의 내면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으며 지극히 자기 주관적인 시각에서 작곡된 곡이다.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말러가 6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시기는 그의 인생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아내 알마 말러 역시 행복한 시기를 살아가던 그가 비극적인 음악을 작곡하는 모습을 보고 이러한 말러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말러의 비극적이라는 제목은 그의 현실과는 상관없이 그의 일생 전체를 통틀어 고뇌하던 삶에 대한 시선과 고통을 투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6번 교향곡이 말러의 작품 통틀어 독특한 성격을 가진 것은 많은 말러의 작품이 어둠에서 빛으로 라는 결론을 가졌으나,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둠을 간직했고 비극적으로 종결된다. 유일하게 빛의 테마를 가진 부분이 있는데 1악장의 제 2 주제가 그 부분이며 이러한 부분은 바로 아내 알마 말러를 표현한 것이다. 비극적이며 어둠속에서 유일하게 말러가 바라본 인생의 빛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였던 것이며, 이러한 테마는 작품 내내 거침없이 몰아치는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추천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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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번스타인/뉴욕필(SONY,1967)★★★★★
역시 번스타인의 말러는 매우 뛰어나다. 폭풍처럼 밀어붙여가는 빈필과의 연주(DG)도
매우 뛰어나나, 전체적인 완성도와 드라마틱한 측면으로 보았을때 뉴욕필과의 연주를
더욱 높게 평가해주고 싶다. 번스타인은 뉴욕필을 통해 매우 극적이며 뛰어난 해석과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매우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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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베를린필(DG,1977)★★★★★
카라얀의 말러 6번은 그의 다른 연주들이 그렇듯 매우 섬세하고 정교한 앙상블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교하고 섬세한 해석은 한층 말러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카라얀은 이 연주에서 비극적인 테마와 아름다운 테마를 확실히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카라얀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해석은 이러한 해석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기존의 해석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좋지 않을 것이다.



Leonard Bernstein, Wiener Philharmoniker / Mahler Symphony No.6 Tragic
Tag : 구스타프말러


Claudio Abb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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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아바도(1933.6.26 ~ )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전반까지 세계 음악계를 이끌어 온 위대한 지휘자들중 한사람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최고의 자리에서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을 이끌어 왔다. 말러, 슈베르트, 라벨, 차이콥스키, 멘델스존 그리고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포함, 다수의 녹음들과 세계 음악 팬을 사로잡았던 많은 콘서트들은 그가 지휘자로 루었던 업적과 명성을 대변하고 있다.

1933년 6월23일에 아바도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켈란젤로 아바도 (Michelangelo Abbado)는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아바도와 그의 형은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와 음악수업을 처음으로 받았다. 1955년, 밀라노 음악원에서 교육을 받던 아바도는 피아노 전공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음악원 재학중 아바도는 안토니오 보토(Antonio Votto)에게 지휘법을 배웠고 같은 해, 잘츠부르크에서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와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3년동안 아바도는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한스 스바로브스키(Hans Swarowsky)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58년, 트리에스테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같은 해, 미국 탱글우드의 쿠세비츠키(Koussevitsky) 경연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이를 계기로 아바도는 파르마 음악원의 교수직뿐만 아니라 지방의 여러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계약을 맺었으며 1960년에는 라 스칼라(La Scala) 데뷔 무대를 가졌다.

1963년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Dimitri Mitropoulos)상을 수상과 함께 뉴욕 필하모닉에서 5개월간 일할 기회를 얻게 되는데, 그 해 4월 7일 아바도는 공식적인 미국 데뷔무대를 가졌다. 1965년에는 빈 필하모닉(Wiener Philhamoniker)을 지휘하면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뷔하였다. 이듬 해, 1966년에는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였으며 1967년에는 다시 빈 필하모닉의 기부금 콘서트 시리즈로 빈 데뷔 무대를 가졌다.

1968년부터는 고향으로 돌아와 라 스칼라에서 레지던트 디렉터를 거쳐 1971년 정식으로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특히. 아바도는 재임 기간중 전통 이태리 오페라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레퍼토리를 연주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델라 스칼라(Orchestra della Scala)"를 조직하였다. 그는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쉔베르그, 노노, 리게티 그리고 스톡하우젠 같은 현대음악 작품들의 뛰어난 해석으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

1971년, 빈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며 1973년에는 빈 필하모닉으로 부터 "명예의 반지(Ring of Honour)"를 수여 받았다.
 
1978년에는 유럽 공동체 청소년 관현악단(European Union Youth Orchestra)설립하였으며 이듬 해, 1979년에는 10여년 동안 꾸준히 관계를 지속해왔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988년까지 9년동안 음악감독으로 재직하였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이 시기에 아바도는 1985년, 구스타프 말러에 대한 음악적 공헌으로 국제 구스타프 말러 협회로 부터 메달을 수여 받았다. 한편 1986년에는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교향악단(Gustav Mahler Jugend Orchestra)" 와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Chamber Orchestra of Europe)"를 조직하여 예술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86년, 아바도는 빈 국립 오페라에서 음악 감독직을 맡았으며 빈 시의 총 음악 감독직에 임명되는 영예도 누렸다. 특히. 재임기간중 아바도는 1988년에 현대음악 페스티발인 "빈 모던(Wien Modern)"의 첫 주최를 담당하였으며 지금도 매년 아바도의 감독 하에 이 축제는 열리고 있다. 1989년, 아바도는 카랴안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의 제5대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를 사임하였다. 하지만 젊은 음악가들에게 수여하는 "빈 상(the Vienna Prize)"를 재정하여 빈 시와의 관계를 지속하여 오고 있다.
 
1992년에는 독일의 가장 영예로운 독일 시민 공로상을 수상 하였다. 같은 해, 첼리스트 나탈리아 구트만(Natalia Gutman)과 함께 베를린 페스티발 기간중 고전과 현대 실내악 콘서트에서 전문 음악가들과 재능있는 젊은 연주자들이 함께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는 "Berllner Begegnugen" 을 만들었다. 1994년, 또 다른 카라연의 후임직인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발(Salzburg Easter Festival)"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뮌헨 "에른스트 폰 지멘스 상(Ernst von Siemens Prize)"과 "그래미상(Grammy Award)"을 각각 수상 하였다.  


2002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발의 새 작품 바그너 "파르지팔(Parsifal)"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였고 이를 끝으로 페스티발 예술감독직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직을 사임하였다. 2003년에는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이탈리아와 루체른 페스티발(Lucerne Festival)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2004년이후 2005년까지 아바도는 베를린 필하모닉,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 그리고 루체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와 바덴바덴, 이탈리아등 유럽등지에서 말러를 비롯하여 베토벤, 브루크너, 바그너의 작품들을 연주하였다.
 
2006년 72세의 아바도는 2000년부터 발견된 위암과 투병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잘츠부르그의 콘서트와 "펜테코스트 페스티발(Pentecost Festival)" 일정도 모두 취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07년 11월 페르골레지 탄생 300주년 연주회에서 복귀하였다.
 

<슈베르티아데>



Rossini Guillaume Tell Overture - Claudio Abbado



Karl Bo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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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뵘(1894~1981)

사실 카라얀 생전에 그와 자주 비견되던 인물은 번스타인이 아니라 뵘이었다. 같은 오스트리아인이었고, 베를린 필과 함께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빈 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카라얀 독재시대’에 유일하게 카라얀을 대적할 지휘자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81년 타계할 때까지 독일-오스트리아계의 서양음악 중심 레퍼토리에서 빈 필의 장점을 적극 활용한 그의 후기 낭만주의적인 해석이 크게 호응을 얻었던 탓도 있다.

1894년 그라츠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그라츠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해 법학박사를 받았으나 음악과의 끈질긴 인연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1921년 발터의 초청으로 뮌헨 오페라극장에 지휘자가 되어 정식으로 지휘인생을 시작한 그는 1927년 다름슈타트의 음악총감독이 되었다. 당시 현대음악의 첨병이었던 다름슈타트에서의 인연으로 그는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의 해석에도 일가견을 인정받았다.

1931년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된 뵘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들을 상연하며 작곡가와 깊은 친분을 쌓았고, 이는 후대에 뵘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의 최고 해석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34년에 베버·바그너·R.슈트라우스 등과 깊은 인연이 있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극장으로 옮겨 9년간 힘을 축적한 그는 1943년 드디어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주활동 금지 처분을 받아 물러나게 된다. 1956년 재건된 빈 국립 오페라극장 무대에 다시 섰으나, 일단의 음모에 휘말려 다시 밀려난 그는 67년에야 빈 필의 명예지휘자로 추대되며 끈질긴 악연의 고리를 끊는다.

칼 뵘은 카라얀과는 달리 레코딩에 욕심이 없었다. 게다가 같은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나누어 쓰던 카라얀의 견제로 더욱 폭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카라얀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부분에서는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알반 베르크의 ‘룰루’와 ‘보체크’(DG),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그림자 없는 여인’ ‘엘렉트라’를 비롯한 오페라 전집(DG) 등이 그것이다.

<월간객석>


Mozart Symphony no. 41 K. 551 "Jupiter" Movement 1



환희와 절망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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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정치적 의도와 합쳐질 때 그 빛을 잃고 무너지기 마련이다. 예술가의 정치적 타협, 예술가가 작품을 빚어낼 때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간다면 그 창조물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역사는 언제나 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입장에서 다시금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세기의 마에스트로라 불리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괴벨스는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게르만 민족과 세계인의 통합을 이끌어 내려 했다. 이 마에스트로의 행적을 우리는 비판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해야하는 것일까? 푸르트뱅글러가 나치스 치하에서 연주한 연주회 중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연주회는 1942년 4월 20일 베를린에서 있었던 히틀러 생일 기념 전야제 연주회일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 참여해 나치스의 고위 장교들과 간부들 앞에서 지휘봉을 든 이 위대한 예술가의 행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이 연주회에서 울려 퍼진 곡은 아이러니하게도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었다. 베토벤 합창 교향곡에서 표현되는 사랑, 그리고 고난을 이겨낸 환희는 전 인류에 대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 연주회에서 푸르트뱅글러가 그려내어 전달되는 합창교향곡의 환희는 게르만민족과 히틀러를 위한 것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전 인류에게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되는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연주를 들어보고 생각해보자. 일찍이 이렇게 광기에 가득 찬 합창 교향곡이 존재했던가? 마지막 피날레의 미칠듯한 질주...푸르트뱅글러가 그려낸 합창교향곡의 폭발력과 광기는 권력자 히틀러와 게르만 민족에 대한 찬양의 환희인가? 아니면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독일과 인류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어두운 시대를 만들어낸 히틀러와 나치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것인가?

푸르트뱅글러도, 히틀러도 세상을 떠난 지금, 해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D단조 Op. 125, 1942년 4월 20일 베를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루노 키텔 합창단




브람스 교향곡 제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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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오후 3시 명동 천주교성당 대문앞 골목길,
고전음악 다방 '크로이체'서 브라암스 교향곡 제4번을 들으며,
눈물겹게 앉아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도 근사하고 훌륭한 음악이 있을 성싶지
않습니다. 내 가슴의 눈물겨움은,
다만 소리내어 울지 않게끔 해야겠다는 결의의 상징일 겁니다...
.
.
.
이것은 무슨 음악이지요?
새벽녘 머리맡에 와서
속삭이는 그윽한 소리.

눈물 뿌리며 옛날에 듣던
이 곡의 작곡가는
평생 한 여자를 사랑하다 갔지요?

아마 그 여자의 이름은 클라라일 겝니다.
그의 스승의 아내였지요?

백년 이백년 세월은 흘러도 그의 사랑은
아직 다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녘 멀고 먼 나라
엉망진창인 이 파락호의 가슴에까지
와서 울고 있지요?

 천상병 시인의  - <송 브라암스>, <음악>

곡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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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es Brahms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은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다. 브람스는 이 교향곡을 완성하고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교향곡 4번은 앞서 작곡된 교향곡 세 곡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1번~3번의 교향곡이 역경을 이겨내며 고난을 극복하는 의지와 아름다운 전원을 표현하는데 주력하고 있고 짜임새있는 구조로 펼쳐져 있으나. 교향곡 4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깊은 우수에 잠들어있다.

흔히 이 교향곡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브람스의 애처로운 심정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평생 말없이 사모하던 클라라가 죽은 이후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브람스. 깊은 상실감과 함께 인생의 말미를 예감한 대 작곡가는 그의 심정을 그대로 선율로 담아냈고 교향곡 4번에는 이러한 그의 복잡하고 서정적인 마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녹아들어 있다. 위와같은 이유로 교향곡 4번은 브람스 스스로도 매우 아끼던 교향곡이었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연주를 지켜본 곡이기도 하다.

브람스를 유독 좋아하여 브람스에 대한 시를 많이 남긴 천상병시인은 이 교향곡을 매우 사랑했으며, 매일 아침마다 커피 한잔과 함께 브람스 교향곡 4번을 감상하는 것을 인생의 낛으로 삼곤 했다고 한다. 음악세계 전반에 걸쳐 서정적인 선율이 많기에 가을의 작곡가라는 별명이 있는 요하네스 브람스. 이번 가을에는 천상병 시인처럼 브람스 4번의 선율에 사로잡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Symphony No. 4 in E minor op. 98

I. Allegro non troppo
II. Andante moderato
III.Allegro giocoso
IV. Allegor energico e appasionato

추천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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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터/콜롬비아 심포니(SONY/1959) ★★★★★
부르노 발터의 이 연주는 브람스 4번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주중 하나로 꼽힌다. 이 곡의 본질인 애수에 찬 서정미를 확실하게 짚어내고 있으며 인간미 넘치는 해석은 브람스 4번의 매력을 한층 뿜어내게 한다. 브람스가 이 곡을 작곡하며 느낀 만년의 고독. 그 고독함을 가장 잘 살린, 작곡가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한 최고의 연주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작곡가가 위대한 지휘자를 통해 살아난 연주. 녹음 상태가 그리 좋은것은 아니나, 부족한 녹음상태 속에서도 이 연주는 빛을 맘껏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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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비다케/뮌헨필(EMI/1985) ★★★★☆

일 평생 음반을 남기지 않았던 '야인' 첼리비다케. 이 음반은 사후 실황연주를 녹음한것을 발표한 것이다. 첼리비다케는 느린 템포로 유명한데, 특유의 느린 연주로 소리의 울림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도록 공간을 잡아 연주하고 있고 악기의 구성은 감정의 이입을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하여 표현하고 있다. 첼리비다케는 브람스를 즐겨 연주했는데, 그 중에서도 3번과 4번을 사랑했다고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연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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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버/빈필(DG/1980)★★★★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인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연주. 그는 첼리비다케 처럼 레코딩을 혐오했던 야인이었으나, 다행히도(?) 몇몇 음반을 남겨 그가 죽고난 지금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클라이버는 베토벤 교향곡 5번과 7번 그리고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즐겨 연주했다. 클라이버는 일평생 이 곡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고집했는데, 이 연주는 특유의 템포조절과 짜임새로 곡을 표현하고 있다. 클라이버는 템포와 악기의 조절에서 상당히 독특하고 명쾌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의 이러한 독특한 해석은 언제나 호불호가 갈리고 있고 이 연주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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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베를린필 (DG/1977) ★★★★
카라얀은 이 연주에서 일반적인 템포로 곡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템포를 통한 감정이입보다 현악의 울림과 특유의 레가토로 곡을 살리려 시도했다. 카라얀과 베를린필이 만들어낸 연주는 감정이입에 매우 적극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좋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완성도는 후반 악장으로 갈수록 높아지고 잘 다듬어지고 정제된 기량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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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렘페러/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EMI/1957) ★★★☆
클렘페러의 브람스 4번 연주는 보다 빠른 템포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연주를 보여주고 있으며 악상적으로는 흠잡을데가 별로 없으나 브람스의 서정미를 완전히 표현하지는 못한듯한 연주를 보여준다. 클렘페러 특유의 정확성, 그리고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이 묻어나는 듯 하여 개성있는 연주이나. 그의 이러한 성격이 브람스의 서정미를 표현하는데 있어선 단점으로 작용한 듯 하다.


야사 하이페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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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cha Heifetz

Jascha Heifetz(1901.2.2 ~ 1987.12.10)


정확히 20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 러시아의 빌나에서 태어난 그는 빌나 심포니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루빈 하이페츠에게 세 살때부터 1/4사이즈 바이올린으로 기초를 배우기 시작해 86년의 생애중 83년 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그 83년간의 사투에서 그는 끊임없이


활을 긋고 또 그었다. 여섯 살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는데 당시 청중들은 " 매끈하고 둥근 음색과 완숙한 솜씨로 작은 손가락이 매우 어려운 음표들을 유려 하게 짚어나가는 모습에 마법에 걸린 듯 황홀하였다 "고 한다.


1910년, 아홉살의 나이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당대 최고의 스승인 레오폴트 아우어 교수를 사사했다. 아이페츠 또한 아우어 교수의 탁월한 음악교육에 찬사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신동들은 대개 나중이 되면 치명적인 퇴락으로 끝이 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살아남은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죠. 중간치기를 용납 않는 집안 분위기가 하나의 이유였다면 또 하나의 요인은 레오폴트 아우러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아우어 문하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지 2년 만에 아르투르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전설의 시작을 세상에 공표했다. 이듬해인 1913년에 아이페츠는 라이프치히에서 브루흐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크라이슬러와 짐발리스트가 참석했었다. 12세 소년의 연주들 듣고 난 후 크라이슬러는 질발리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자네나 나나 이제는 바이올린을 대던져 박살내는 편이 나을 것 같네 "


1917년 무렵 이 어린 샛별의 명성은 이미 스승인 아우어와 비견될 정도로 높아졌고 10월에 시베리아와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 똑같은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하이페츠를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꼽는 이유는 아름다운 음색과 깊이를 음악 안에 담을 줄 아는 그의 능력, 흠잡을 데 없는 심미안등이다. 하이페츠는 정확한 기교구사 이상의 예술가로서의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의 연주는 차갑다고 오해받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그의 연주회장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가 들려주는 극도의 서정적인 표현 때문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감상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이페츠의 연주에 대한 평가는 양극으로 갈린다. 결코 '그저 그런'  '잘 모르겠다'등의 수식어는 절대 따라붙지 않는다. 꼿꼿한 그 특유의 일관된 자세와 변화없는 표정으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 완벽한 음들에 열광하는 추종자와 따스함이 부족 하다며 고개를 돌리는 - 그러면서 반드시 바흐와 오이스트라흐의 예를 들어 - 반대자.

이 둘의 집단은 항상 있어왔다. 세상의 어떤 연주자들도 모든 이를 모든 레퍼토리를 다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이페츠레게서만은 그 반대자의 존재 자체가 공격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인간적인 면을 들어 공격의 주재료로 삼는 연주자의 경우도 그밖에는 찾기 힘들다. 도대체 그의 연주를 감상하는 데 그의 성격이 어디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그의 '차가운' 면이 기록으로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차가운 면모는 외향적 이지 못했던 성격과 연주에 대한 완벽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66년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을 협연할 당시 지휘자의 해석방식에 매우 불만을 느낀 하이페츠는 결국 그 지휘자를 해고했다 (당시 그의 위세는 그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활로 직접 지휘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완벽성에 대한 추구가 차갑다라는 평가를 듣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이페츠를 차갑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라. 그의 '연주만'들은 것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는디, 혹 감상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자신의 과거 감상 경험이 지극히 주관 적인 - 루바토로 점철된 - 연주에 주로 감동되었는지를, 감사으리 관점에서 볼때 하이페츠의 연주는 대부분 경탄으로 시작하여 익숙해질때까지는 좀처럼 편안하게 감동의 순간으로 전이해 갈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온몸의 신경을 귀와 머리에 모두 집중하여 팽팽한 긴장상태를 만들게 된다. 즉 감성보다는 이성이 먼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 과정이 어느 정도 지나가면, 즉 익숙해지면 그제서야 그 너머의 밀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느껴지는 감동의 폭은 어느 한쪽만의 절름발이가 아닌 시너지의 폭발이 된다.


하이페츠가 주는 그것은 결코 멜랑콜랑한 부드러움은 아니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신선함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 골라듣기 시작하는 본격 감상자들에게 매우 경제적인 선택이 되기도 하는 장점까지 있다. 물론 거센 비판의 세례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몇몇 레퍼토리가 있기는 하다.


가장 혹독한 비판을 들었던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나 모음곡들의 연주는 그의 개성이 너무나 강하게 배어 있다고 - 비록 그 자신이 원래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는 징후는 명백하지만 - 주된 공격의 재료가 된다. 또한 이중 협주곡의 독선적인 연주 역시 치명적인 흠집을 내고 있다. 그러나 전술했다시피 왜 모든 작곡가의 모든 작품을 특출하게 잘하지 못했다고 그만이 바난받는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한다.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했던 칼 플레쉬의 말을 인용하자면 " 역사적으로 절대 완벽한 연주자는 아직 없었다. 그래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하이페츠가 유일한 예다 " 마법의 미밀, 하이페츠의 비브라토  날카루운 눈빛을 번뜩이며 바이올린을 높이 추켜올린 채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완벽한 연주로 청중을 열광시켰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 아무리 어려운 기교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듯, 미동도 않은 채 정확하고 재빠르게 활을 움직이며 폭탄과 같은 음을 그가 이처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된 까닭은 무엇일까?


대개의 바이올리니스트가 그렇듯이 하이페츠의 비르라토 폭은 반음의 반 즉 1/4음(약 50cent) 이었으며 1초당 비브라토는 6회정도였다. 그러나 유독 하이페츠의 비브라토를 분석한 자료들의 표준편차만은 현저하게 적었다. 이것은 곧 아이페츠가 어떤 음을 연주하더라고 비브라토의 폭과 속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음에 따라 음색에 변화를 주지 않고 단조롭게 표현한다는 사실을 암시 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비브라토 테크닉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정확한 인토네이션을 유지하면서 힘차고 고르게 진동하는 그의 비브라토가 긴장된 톤을 만들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 러시아식의 강력한 운궁법이 가세하지 않는다면 하이페츠 특유의 밀도 높은 음색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하이페츠는 활의 힘을 조절하는 오른소 집게손가락을 위로 올려 활을 좀 더 깊이 감싸쥐는 러시아 스타일의 활 잡는 법을 선호했는데 이러한 방법을 쓰면 활을 현에 더욱 밀착시켜 강렬한 소리를 얻어낼수 있다.


그는 같은 곡의 같은 악구는 반드시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분량의 활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전에 모든 활을 움직임을 철저히 계산하고 분배하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미리 정해놓은 운궁법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재현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슈베르티아데


Paganini Caprice No. 24





말러 교향곡 5번

Mahler Symphony No.5 in C sharp minor

Sir Simon Rattle/Berliner Philhamoniker

죽음 그리고 빛....


Luciano Pavaro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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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

불멸의 목소리

끝내 커튼콜을 받아주지 않고 무대를 떠나다.

하늘로 올라간 그의 위대함을 기억하며..

Nessun Dorma!



Nessun Dorma..


카라얀과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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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은 스피드 광으로 알려져있다.

그가 소유한 자동차는 10대가 넘지만 몇대의 포르쉐, 롤스 로이스, 벤츠, 스바르, 아우디 콰트로 그리고 폭스바겐 골프등...특히 골프는 엔진을 6기통으로 개조한 것으로, 차체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스피드를 내는 차다.


나이가 이미 70을 넘어서도 그는 한적한 시골길을 240km/h로 질주하면서 스피드를 즐겼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비행기란 존재는 어쩌면 그가 관심을 가지지 않고는 어쩔 수 없는 그런 것일 것이다. 끝없는 하늘, 광활한 구름 바다 위를 새처럼 훨훨 날고 싶은 것은 카라얀의 원초적인 꿈이기 이전에 수많은 젊은이들의 꿈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중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으로 있던 음의 예술가 카라얀에게도 소집 명령장이 떨어졌다. 그때 그는 소집 명령을 기회라 생각하고, 공군에 입대하여 파일럿 자격을 따냈었으나, 그 명령이 각하되는 바람에 '파일럿 카라얀'의 출현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카라얀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깊은 나락에 떨어졌던 때는 전쟁 말기와 그 후 오케스트라 지휘 활동이 금지되었던 때였다. 이후 그의 생활이 다시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워진 것은 1953년 여름으로, 그는 4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비행기 조종에 도전할 수 있었다. 스위스 아스코너에서 일개 학생으로 되돌아가 교관의 지시에 따라 혹독하리만큼 강도 높은 훈련과 이론 학습을 견뎌 냈다.


이때 그의 훈련기는 프롭기였지만, 훈련을 마친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파일럿 자격도 획득했다.


카라얀에게 있어서 비행기를 몰고 하늘을 나는 것은 그의 다양한 취미 가운데에서도 최대의 것이었고, 또 이것만큼 열성을 보인 것도 없었다. 하여튼 그의 항공기 조종은 단순한 취미의 영역을 넘어 실용화되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 유럽 4개국에서 일을 마치고 저녁에는 집에서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눈이 두껍게 쌓인 장크트 모리츠의 비행장에선 자신이 아끼는 '팔콘 10'을 능숙하게 몰고 날아다니는 카라얀. '팔콘 10'은 6-7인승의 작은 제트기로, 장크트 모리츠의 전용 비행장에 세워 둔 다른 제트 여객기들에 비하면 장난감처럼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팔콘 10'은 장난감이 아니다. '파일럿 카라얀과 팔콘 10'의 비행은 멋 중의 멋이었다.



그는 비행기를 조종할 때는 언제나 젊어 보이는 스포티한 점퍼 차림으로 나선다. 출발 20분 전쯤 도착하여 조종석에 앉으면, 부조종사와 함께 그날의 비행 계획과 차트 지도, 기상 상태 등을 세밀하게 점검한다. 다음 순간, 그는 마치 보통 자동차라도 모는 듯한 능숙한 동작으로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달린다.


둥실 떠오른 비행기, 기내에서 바라보는 지상의 세계는 한순간 숨이 멈추어질 만큼 황홀한 별천지이다. 수평 비행을 하며 바라보는 산과 산들.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알프스의 끝없는 산록 사이를 누비는 작은 제트기는 대자연의 웅대한 품속에 맴도는 하나의 환상이고, 희망이기도 하다. '파일럿 카라얀'은 둥근 원을 그리는가 하면, 빙빙 돌다가 다시 여유 있게 날개를 펴는 '새인간 카라얀'으로 화려한 변신을 한다.


자연과의 합일, 그 순간의 카라얀은 벅찬 감동과 행복에 도취된 승리의 신, 개선 용사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는 제트기도 컴퓨터에 의한 완전한 계기 비행이 가능하지만, 카라얀은 계기 비행을 거부한다. 손수 조종하는 게 아니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특히 이 장크트 모리츠 공항에 착륙하기를 좋아했는데, 그것은 이 공항이 지형적으로 스릴을 느낄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다른 공항과 비교해 이곳은 고도가 현저히 높고, 산악 지대에 있어 기상 조건이 나쁘고 항상 눈이 가득 덮여 있어 맑은 날이 드물다. 상공을 선회하면서 일순 눈이 걷힌 작은 공간을 발견해 착륙하는 것은 모험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다.


카라얀은 이처럼 항상 무언가에 도전하고, 도전해야만 하는 챌린저인지도 모른다. 젊지 않은 젊은 챌린저...... 그의 그런 도전 정신은 그를 정신적으로 젊게 만드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순회 연주를 떠날 때에도 그는 언제나 하늘을 타고 간다. 언제나 가슴 속으로는 하늘에 대한 동경을 품고 가는 것이다.



어떤 때는 항공사 파일럿 양성소를 방문해 보잉747조종석에 앉아 보는 희열을 누리기도 한다. 그의 만년인만큼, 보잉747이야말로 최신의 비행기였기 때문에, 그는 비행기를 처음 타 보는 나이 어린 홍안의 소년처럼 흥분해서, 조종석에 않아 교관의 상세한 설명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실제 비행 훈련에 들어갔을 때 그는 매니아답게 진지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정신을 집중, 교관의 지시대로 계기들을 움직였다.


그는 1회의 이륙과 2회의 착륙연습으로 747기의 조종에 합격점을 얻었다.


그는 또 헬리콥터에도 도전을 했다. 실로 경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태평양을 단신으로 조종해 횡단하고, 그리고 그 다음은 히말라야 상공을 날면서 하늘에서 죽는 것이다."


하늘에서 자유를 보고, 또 그 넓은 폭의 자유와 대화를 나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하늘을 새처럼 날기를 좋아했던 카라얀. 카라얀 음악의 웅대함, 그리고 장대함을 그는 하늘에서 느끼고 배워왔던 것이다.


마치 조종 계기판을 보며 고도 속도 풍향 등을 읽고 정확히 항진하듯, 그는 스코어를 정확히 읽으며 오케스트라라는 하늘 속에 빨려들어가 선회하거나, 급강하하는지도 모른다. 음의 대가 카라얀은, 산과 바다에서도 그러했듯이 하늘에서도 예술혼의 진정한 의미와 음악을 배웠다.


출처 - http://operanara.cafe24.com/

Tag : 카라얀과 비행기